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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he One]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24】企业家兼南北交往的中介郑周永逝世,享年86岁

正文


       “韩半岛面临一触即发的紧张态势。”这是最能体现2017年韩半岛政治局面的一句话。难怪“朝鲜核危机”一词成为中国网民的搜索热词。

实际上,在韩国与朝鲜的关系出现紧张局面之前,现代集团会长郑周永开创的“金刚山观光”、“开城工团”等南北交流项目都早已被中断。讽刺的是,郑周永会长生前最信任的亲信之一李明博,正是决定停止运作金刚山项目的人。当时,一名韩国游客误入朝方军事禁区,被朝方士兵枪击身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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位于郑周永会长私宅的郑周永名誉会长的灵堂。2001年3月21日,郑周永会长逝世。


       继李明博总统中断金刚山项目,朴槿惠政府以切断朝鲜的财源为目的,关闭了开城工团。究竟怎么做是正确的,时间会证明。只不过,很明确的是,在郑周永向往的世界里,确实有和平的世界以及稳定的韩半岛局面。
       从这一点来看,郑周永是真正的“(韩半岛)统一运动人士”。“只要南北能够统一,韩国必定能成为全球最闪烁的星星之一。”这是郑周永平时就强调的想法。其实,郑周永所说的“统一”,并不是宏伟的国家合并计划,而是分散在韩半岛各地的亲人保持联系,能够确认彼此的生死。如果朝鲜与韩国人民之间能够经常联系,将会促进彼此之间的沟通与理解。“韩朝双方逐步拉近距离。”这正是郑周永对“南北交流”的想法。郑周永经常说:“朝鲜人也姓金、或李、或朴等,(和韩国人的姓氏一样),双方没有理由不见面。”看上去很容易促成的交流,为什么始终没法达成呢?“这都是因为政治家们。”郑周永抱怨道:“政治家们只考虑统一时需要支付的费用,对交流活动的态度比较消极,这就是问题。”
       郑周永相信,民间的经济交流先行之后,才能有政治等其他领域上的交流。金刚山观光正是民间经济交流的第一步。若说金刚山观光项目是韩朝经济交流的起点,那么开城工团则是交流的高潮,以韩国资本为基石,韩国与朝鲜劳动者一起创出新的价值。正如许多韩国人认为的,朝鲜并没有为了赚钱而建立开城工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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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刚山陆路观光团。可以同时看到前往金刚山的韩国车队与从朝鲜回到韩国的车队。(2003年)


       这一点在开城工团的地理位置上显而易见。对于朝鲜而言,如果将开城工团建立在中国国境附近,那就会更加易于出口朝鲜的物品。郑周永从一开始就主张在开城建立工团,韩国与朝鲜人民一起携手制造优质的产品,将朝鲜的物品出口到韩国,朝鲜才能有更强的竞争优势。因为在中国国境附近建立工团,本来就较高的对中市场依赖度只会更高。郑周永的说法成功说服了当时的朝鲜最高权力者金正日。开城工团开始生产之后,由于是韩国人与朝鲜人一起生产的物品,签订自由贸易协定的时候,开城工团的物品被认为是“韩国产产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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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在游览内金刚的观光客们。(2007年)


       其实,开城工团是郑周永逝世之后,时隔2年才建成的。相当于郑周永的遗作。2003年6月,开城工团的建设工程正式开工;2004年12月,开城工团开始生产第一批产品。是的。2001年3月21日,郑周永逝世。享年86岁。郑周永年幼时身无分文离家出走,空手创业,积蓄致富,成为韩国的首富。不只是个人的富裕。郑周永以现代建设的技术为基础,成功完成被称为“韩国的经济动脉”的京福高速公路,并建造了昭阳江大坝等许多重要的建筑物,还不顾美国的反对,自主研发了韩国的汽车——现代汽车,从维修日本汽车的维修厂跃升为世界级水平的汽车公司。郑周永用印着著名的铁甲舰“龟船”的韩国纸币,成功拿到海外借贷,设立了现今世界第一造船公司“现代造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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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京畿道坡州板门店附近看到的开城工团。郑周永逝世两年后建设的开城工团,是“统一运动人士”郑周永会长的遗作。


       但对于韩国人而言,郑周永不只是“经济上的英雄”。驱赶着牛群越过板门店的郑周永;把开往金刚山的第一艘船送出江的郑周永……都是为了分担祖国分裂痛苦而尽力的“英雄”。郑周永为祖国的和平倾注的努力得到了肯定。2001年,郑周永被授予“第5届万海和平奖”;2006年,郑周永被列入美国时报评选的“亚洲的英雄”;2008年,他被授予“第4届DMZ和平奖大奖”。这些奖都是郑周永逝世之后被授予的。可见,大家都还记挂着他。作为企业家兼南北交流的中介郑周永,直到现在还留在韩国人的心里。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마지막편)

 

기업가이자 남북운동가 정주영 86세로 소천하다

 

 

한반도 일촉즉발의 긴장’. 2017년말 한반도의 정세를 평한 한마디 말이다. 오죽했으면 중국에서 ‘북핵위기’가 민간 뽑은 인터넷 유행어로 꼽혔을까?

사실  보다 앞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일궈 놓은 남북교류 경제의 기반인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사업 모두가 중단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주영 회장이 가장 신임했던 인물로 꼽히는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 뒤 금강산 관광을 아예 중단했다. 우리 관광객이 경계선을 넘어 가 총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개성공단 폐쇄는 이명박 대통령의 뒤를 이은 박근혜 정부의 조치였다. 모두 북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줄을 막자는 것이었다. 무엇이 옳은 조치인지는 역사가 답을 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주영 개인의 꿈꿨던 세상은 누가 봐도 세계의 평화와 한반도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정주영은 그런 점에서 진정한 ‘통일 운동가’다. “남북이 통일이 되면 한국은 세계 속에서도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정주영의 평소 지론이었다. 정주영이 이야기 하려던 남북 통일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피붙이 간에 죽었는지 살았는지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서로 자주 만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서로 다가가야 한다는 게 정주영의 남북 교류에 대한 생각이었다. “북한 사람도 모두 김씨, 이씨, 박씨인데 서로 만나지 이유가 없다”고 정주영은 항상 말했다. 그렇게 쉬운 교류가 왜 안될까? 바로 정치인들 때문이라는 게 정주영의 생각이었다. “정치인들이 통일비용만 생각하고 교류에 적극적이지 않아 문제”라는 게 정주영의 불만이었다.

민간차원의 경제 교류가 선행되야 한다는 정주영의 남북 교류의 신조였다. 금강산 관광은 그 첫 시도였다. 우선 남쪽 사람들이 북녘 땅을 밟도록 했다. 이어진 개성공단은 완성판이었다. 남한 자본에 북녘 노동자들이 합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특히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듯 개성공단은 북이 돈을 원해서 만든 게 아니었다. 북한은 그 뒤에도 중국과 국경에 경제특별구역을 만들었지만, 정주영 회장은 처음부터 개성을 주장해 당시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을 설득해 얻어낸 성과였다. 한국 사람들 손에 만들어져 한국으로 가 수출되야 경쟁력이 있다는 게 정주영 회장의 판단이었다. 중국 국경에서 만들어져 중국을 통해 수출되면서 중국 시장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는다는 주장이었다. 실제 이 판단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때 개성공단 생산품도 한국 제품으로 인정받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사실 개성공단은 정주영 사후 2년 뒤에나 성사됐다. 그의 유작인 셈이다. 2003년 6월 착공됐다. 이듬해 12월에야 첫 생산품이 나왔다.

그렇다. 정주영은 2001년 3월 21일 소천했다. 향년 86세. 정주영은 어린 나이에 가출해 말 그대로 맨발에 빈 손으로 모든 것을 시작해 한국의 최고 부를 이룬 인물이었다. 개인적 부뿐만이 아니다. 현대건설을 통해 경부고속도  한국 경제의 동맥인 고속도로망을 건설했다. 한국 현대화에 기여한 수많은 건축물들이 그의 손에 의해 지어졌다. 소양강댐이 대표적이다. 그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자체의 자동차를 생산했다. 그게 지금의 현대자동차다. 일 자동차를 수리하던 수준에서 세계 자동차업계 수위의 자동차 회사로 발돋움했다.

조선시대 당대 세계 유일했던 철갑선인 거북선이 그려진 한국 돈을 가지고 해외 차관을 얻어와 지금 세계 1위 조선업체인 현대조선을 세웠다. 하지만 한국민에게 그는 이런 경제 기적을 이룬 것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던 정주영의 모습, 금강산관광의 첫 배를 띄우던 정주영의 모습은 민족의 오랜 한인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던 모습이었다. 그 공으로 그는 2001년 제5회 만해 평화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미국의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으로 꼽혔다. 2008년 제4회 DMZ 평화상 대상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그의 사후에도 그를 잊지 못해 이뤄진 일이다. 정주영, 그는 한국인의 가슴에 기업인이자 남북교류 운동가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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