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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칭에게 준 마오쩌둥의 옥수수 선물, 그 비밀은?

1970년 중추절 마오쩌둥毛泽东은 아내 장칭江青에게 옥수수 5개를 선물을 한다.
맛있게 익힌 찰옥수수였다.
당시 장칭은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는 주요 인물이었다.
장칭은 아무런 생각 없이 옥수수를 받아 함께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이들과 나눠 먹는다. 

 

 

 

  

 

 

 

 

© reo, 출처 Unsplash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은 달랐다.
옥수수에 당대 역사 흐름을 바꿀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무슨 비밀이고, 한숨을 쉰 이는 누굴까?

잠깐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한 가지 중국 정치사의 독특한 현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 정치인들이 사물을 빗대 암호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인물과 사례가 삼국지 조조曹操다.
조조는 한자 암호 놀이로 유명하다.
궁궐을 짓고 문을 본 뒤 대문 위에 활活 자를 쓴다.
모두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황당해 할 때,
양수만이 조조 맘을 이해하고 "문을 헐어 더 넓히라"라고 했다.
'문'門 안에 활자가 들어 있는 것은 넓을 '활'闊이기 때문이었다. 

 

 

 

 

 

 

 

 

© tinaflour, 출처 Unsplash 

 

계륵의 고사도 유명하다.
조조가 유비刘备와 다툴 때 고사다. 
한중汉中을 지키는 유비 저항이 워낙 강해 진격도 퇴각도 못하고 있었다.
마침 저녁 반찬으로 닭 요리가 나왔고,
조조가 당일 저녁 경비 구호를 '계륵', 닭갈비라고 하자, 
양수楊脩가 한중을 포기하려는 조조의 마음을 읽는다.
양수는 섣불리 주변에 철수 전비를 시켰다 조조의 분노를 사 죽임을 당한다.

그럼 마오쩌둥의 옥수수 선물에는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먼저 옥수수 선물의 숨은 의미를 안 유일한 인물 먼저 알아야 한다.
바로 캉성康生이다. 

 

 

 

 

 

 

 

 

 

왼쪽부터 장칭, 천보다, 캉성, 장춘차오의 모습 출처=바이두

 

캉성은 본명이 张宗可, 자오룽趙容 등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산둥 山東 주청諸城 출생이다. 어려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상하이上海대학을 졸업한 인재다.
1920년대 초 중국공산당에 입당, 1938년 당 중앙 서기국 당보黨報 편집위원회 주석 등을 지내며 필명을 날린다.
1966년 문화대혁명 후에는 중앙문혁소조中央文革小組 고문으로서 활약하였다. 

장칭은 선물을 받자, 바로 주변 캉성 등 문화대혁명의 주요 인물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모두 장칭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옥수수를 받았지만,
캉성만은 달랐다. 그는 옥수수를 받자 긴 한숨을 쉬며 비서에게 말했다. 

이건 마오 주석의 경고야.
찰옥수수같이 迷迷糊糊, 흐리멍덩하지 말라는 경고이지.
여기 5개는 군위판사조军委办事组의 다섯 명을 뜻하는 것일 수 있어.
그 수뇌인 린뱌오와 장칭이 너무 가까운 것에 대한 경고일 수 있어.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그리고 이 말은 절대 장칭에게 들어가게 해서는 안돼.
장칭은 똑똑하고 민감해서 …

중국어로 옥수수를 위미玉米yùmǐ라고 한다.
찰옥수수의 粘Nián이 붙어 粘玉米라 한다. 여기서 쌀 미는 미혹할 미迷와 발음이 같다.
캉성은 마오쩌둥의 의미를 미迷에서 찾은 것이다. 

 

 

 

 

 

 

 

© qimono, 출처 Pixabay 

 

과연 캉성의 해석은 옳았을까? 

그 뒤 실제 린뱌오林彪는 바로 마오쩌둥의 신뢰를 잃는다. 
궁지에 몰린 린뱌오는 모반을 꾀하려다 사전에 발각돼 1971년 9월 13일 소련 망명길에 올랐으나,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한다.
장칭 역시 마오쩌둥의 신뢰를 조금씩 잃어 덩샤오핑邓小平 등의 복권을 막지 못하고 조금씩 권력을 빼앗긴다.
캉성은 상무위원까지 역임하고 1975년 12월 16일 베이징北京에서 병사한다.
하지만 죽은 뒤 5년 뒤인 1980년 10월 16일 기율위 조사를 통해 당적을 박탈 당하고 만다.
결국 아무리 똑똑해서 죽은 뒤의 화禍까지 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 wflwong,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