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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인물탐구] <9> 장칭의 한恨

자료를 보면 장칭은 허영심 많고, 끼 많은 여인이다. 여배우로서 성공을 위해 남성 편력을 했을 정도다. 그런 그녀에게 마오쩌둥의 그늘에서 살림이나 하라 하면 그것은 어쩌면 그녀에겐 가장 가혹한 형벌일 수 있었다.

 

 

마오쩌둥毛泽东의 사생활이나 돌보라, 당의 일에 나서지 말라. 약법삼장의 골자다. 
일단 장칭江青도 받아들인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꿈같은 신혼생활을 한다. 곧 딸 리나李娜를 낳았고, 마오쩌둥은 그 딸을 너무도 예뻐했다. 그럼 장칭도 약법삼장에 마음으로 승복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이전의 사건이 하나 있다. 장칭의 첫 번째 남편과 관계다. 장칭은 1931년 17세던 어린 시절 지난에서 톈한田汉의 연극 주연을 맡아 크게 성공한다. 그래서 지난의 부유한 집안의 페이밍룬裴明伦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부잣집 며느리 생활에 장칭은 만족하질 못한다. 결국 결혼 두 달 만에 칭다오로 떠난다.

 

또 다른 증거는 딸을 낳고 장칭은 이미 마오쩌둥과 한방을 쓰지 않았다. 공개 장소에서도 자주 다투기까지 했다.  공산당 자료에 따르면 장칭은 마오쩌둥이 공산당 지도자가 된 뒤 만나, 고난을 함께한 깊은 정이 없었다. 그 결과로 마오쩌둥의 사랑은 얻었지만 동지애는 얻지 못 한다. 또 장칭과 마오쩌둥은 성격상으로 서로 맞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볼 때 약법삼장의 제약 탓에 둘 사이 자주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다.

 

 

마오쩌둥은 약법삼장을 지켰다. 마오쩌둥은 항상 집의 서재에서 해외 귀빈을 만났다. 그러나 이런 장소에 장칭의 모습은 없었다.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매 순간이 장칭에게는 고문이었을 것이다.

 

중국 자료에도 1945년 8월 마오쩌둥이 충칭重庆에서 장제스蒋介石와 국공 담판을 할 때 장칭 역시 따라갔던 기록이 있다. 그러나 당시 역시 약법삼장은 철저히 지켜졌다. 장칭은 이빨 치료를 핑계로 마오쩌둥을 따라갔지만, 멀리서 국제 무대의 주목을 받는 마오쩌둥을 지켜볼 뿐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기자들이 장칭에 대해 물으면, "나는 이빨 치료를 하러 왔을 뿐"이라고 답해야 했다.
당시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龄은 장칭과 달랐다. 출신 성분이 달랐다. 국제 무대의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그녀의 언니는 쑨원孙文의 부인으로 명망도 높았다. 훗날 중국 공산당을 지지해 대륙에 남았다. 장칭은 이런 쑹씨 자매의 모습을 마오쩌둥의 그늘 속에 숨어서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본래 질투는 미움이 되고, 미움이 쌓여 한이 되는 법이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중공이 개국한 날은 장칭에게는 바로 미움이 한이 된 날이다.

 


이날 마오쩌둥을 비롯한 당 중앙 간부들은 모두 톈안먼天安门 위에 오른다. 마오쩌둥은 이날 떨리는 목소리로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을 선언한다. 광장은 붉은 깃발과 군중, 꽃들로 가득했다. 이런 성대한 개국 대전이 열리는 날 장칭은 톈안먼 성루에 오르지 못했다. 사실 저지 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장칭은 이날 톈안먼 성루에 오르고자 시도를 한다. 스스로를 "중난하이中南海 사무실 주임"이라고 소개한다. 경비가 이 사실을 개국 대전 총경비를 맡은 지휘부 책임자에게 보고를 한다. 당시 지휘부 책임자는 뤄루이칭罗瑞卿이었다. 뤄루이칭은 사정을 듣고 매정하게 딱 4마디를 한다.

 
"照章办事" 규정대로 해!

 

결국 장칭은 톈안먼 성루에 오르지 못하고 저지를 당한 채 돌아서야 했다. 문화대혁명 발발 이후 뤄루이칭은 첫 번째로 숙청된다. 더욱 장칭의 마음을 다친 것은 그해 연말 마오쩌둥의 소련 방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때 딱 한번 해외에 간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순방 길에 마오쩌둥과 동행한 여성은 장칭이 아니었다.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宋庆龄이었다. 장칭은 쑹칭링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고, 쑹칭링 역시 권력을 탐하는 장칭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후 중국에는 수많은 외국 지도자들이 부인과 함께 방문했지만, 장칭은 약법삼장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장칭은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반발할 수도 없었다.

 

유일하게 반발한 기록이 있다. 1962년 9월 24일의 일이다. 장칭은 런민르바오人民日报의 한 장에 사진에 분노한다. 류샤오치刘少奇가 그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와 함께 소련 지도자를 영접하는 사진이었다. 장칭 전기인 '장칭전'에 따르면 이때 장칭은 왕광메이를 질투해 반드시 밑에 두고 말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사실 이때 장칭은 이미 마오쩌둥의 부인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칭이 마오쩌둥 부인의 신분으로 공식 석상에 첫 모습을 보인 것은 1956년 11월 24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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