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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인물탐구] <10> 장칭 한을 풀 기회를 잡다

아내이면서 아내라 하지 못하고, 중국 영부인이면서 영부인 대접을 받지 못한 장칭의 한은 깊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서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힘을 발휘할 기회를 기다리며 찾아갔다.

 

 


 

문화대혁명의 단초가 된 '해서파관'이 그것이다. 바로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장칭江青은 정권을 향한, 당 중앙을 향해 나아가는 기회를 잡았고, 이어지는 문화대혁명의 와중 속에 당 중앙으로 나아가는 계단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1965년 이후의 일이다. 그에 앞서 장칭은 속내를 참고, 견뎌야 했다. 1938년 11월 20일 마오쩌둥毛泽东과 결혼하는 것을 당 중앙에게 허락받는 일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당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반대를 했다. 장칭이 이런 반대를 어떻게 이겨냈는지는 쉽게 상상이 안되는 대목이다. 오직 마오쩌둥의 결심만이 다른 사람의 반대를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돕기 위한 사례가 있다. 앞서 천윈은 마오쩌둥과 동거 생활을 시작한 장칭에게 "마오는 아직 이혼을 한 상태가 아니다. 부인이 있으니, 행동거지를 조심해 달라"라는 말을 했다. 장칭은 이 말을 바로 마오쩌둥에게 고해바친다. 당시 천윈陈云은 중앙조직부 부장이었다. 마오쩌둥이 화가 나 바로 전화기를 들고 천윈을 찾았다.
 

너희 중앙조직부가 감히 이제는 내 개인 사생활까지 관여하고 나섰구나.


결국 천윈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다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지역 공산당 지도자가 결혼 반대 의사를 밝힌 전보를 보내오자, 마오 역시 바로 전보를 쳐 "내가 쑨중산孙中山에게 배웠다"라고 말했다. 또 이어진 반대의 목소리를 "내가 결혼을 한다는 데, 누가 감히 나설 것이냐?"라고 억눌렀다.


 

 

1938년 11월 20일까지 마오쩌둥은 성대한 결혼 축하연을 연다. 두 번째 연회가 있었던 이날, 당 중앙의 결혼 비준을 받는다. 자료에 따르면 본래 마오쩌둥은 장칭과 결혼식을 성대하게 할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반대를 접하고 마오쩌둥은 남에게 보여주고자 결혼식을 더욱 성대하게 치렀다고 한다.
 

당 중앙 지도자들의 반대는 장칭이라는 인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공산 혁명을 한 것도 아니고, 영화를 찍으며 성공을 위해 남성 편력도 했다는 점도 문제가 됐을 것이다. 결국 결혼에 앞서 당 중앙은 장칭에 대한 개인 사상 검증을 새롭게 했다고 자료에 나온다.
 

한가지 재미있는 역사 사실은 이날 일본 역시 마오쩌둥의 결혼에 묘한 방식으로 훼방을 논다. 당일 일본 폭격기들이 연안 일대를 폭격해 제대로 연회를 치르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다. 마오쩌둥이나 장칭도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소위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제한하는 '약법삼장'을 받아들였다. 20년간 당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가혹하리만큼 철저히 지킨다. 

 


 

 

장칭이 공식 석상에 마오쩌둥 부인이라 소개된 것은 1956년 11월 24일의 일이다. 당시 중국에는 미국의 여류 작가 애너 스트롱을 접견한다. 애너 스트롱 1885년 11. 24~1970년 3.29은 미국 저널리스트이지만, 1930년 모스크바에서 최초 소련 영자지를 창간한 인물이다. 마오쩌둥과는 1949년 옌안에서 만나 그의 '종이호랑이론'을 보도했다. 1958년 중국에 거주하면서 개인 통신인 '중공으로부터의 서한'을 출간하기도 했다.
 

즉 애너 스트롱은 마오쩌둥이 장칭과 결혼 한 뒤 옌안에서 만나 장칭 역시 서로 안면이 있었던 인물인 것이다. 장칭은 이 기회를 잡아 20년의 속박을 2년 먼저 깨고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장칭은 마오쩌둥의 신변 비서로 공식적인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1961년 드디어 모든 굴레를 벗어던질 새로운 기회를 잡는다.